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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칼바리 교회 설교 가사마 료 목사 2023년 6월 4일 「편견을 넘어」 사도언행록 19장 1절~18절 지난 주 화요일에 도쿄 교구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도쿄에 와서는 지금까지 거의 뒤로 일했기 때문에, 제대로 회의에 참가하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교단 의장도 오셔서 여러가지 질문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교단으로서의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여러가지 나름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어 조분반기. 기본적으로 쉬지 않고 교구총회에는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위에는 우울하다든가 가는 의미가 없다든가 가볍게 말하기도 합니다만, 지금까지 교구 총회에서 여러가지 자극을 받아 온 것도 확실합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것이 규슈 교구로, 거기서 교구 총회에 참석했을 때,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던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규슈 교구로서 정면에서 차별과 싸우는 것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여러가지 공부했고, 연수나 차별과 싸우는 현장등을 보여져 좋은 경험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차별과 싸운다는 자세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거기서 배운 것도 많습니다만, 그래서 생각한 것의 하나는, 차별이라고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땅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인간은 집단이 되면 반드시 차별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동질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안심한다고 하는 심리가 있어, 이질적인 것은 배제하고 싶은 마음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집단이 생기면 반드시 거기에는 차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차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시대 제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이상, 차별과는 계속 싸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말하면 차별이 반드시 일어나면 그 집단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하나하나의 사안으로 해결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 차별이라는 것은, 특정한 묶음에 있는 사람을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야말로 몹시 많아서, 태어난 나라나 민족, 태어난 토지, 나이나 성별, 질병, 돈이 없는, 어쨌든 무엇이든 간에, 자신들과 조금 다르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기독교는 항상 그것과 계속 싸워왔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싸움은 기독교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먼저 우리 안에 있던 차별의 마음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 오순절 예배에서 베드로가 로마인에게 성령이 내린 광경을 목격하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 때 베드로는 자신 마음 속에 유대인 이외의 민족에 대한 차별의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알고 자신의 차별의 마음과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페트로의 굉장한 곳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페트로 개인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을 그리스도자 전체의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기서 이 사건이 있었고 나중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마디에서 세 마디를 보자, “그러면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형제들은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들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 때 할례 받은 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 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확실히 사도들로 쓰여 있기 때문에 사도들의 생각도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구원되어야 할 존재는 유대인이었고, 그 외에는 2차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절 이후 페트로는 정중하게 지금까지의 경위를 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즉, 자신이 왜 로마인에게 불려 갔는가. 그리고 그 로마인은 유대인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곳에서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가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신 것 등을 말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스스로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져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주신 성령은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에게 한정하는 것으로 특별감을 내는 것과, 역시 자신의 민족이야말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다는 우월감이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기독교의 처음에는 사실 상당한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곳의 유대인 퍼스트군요. 하지만 그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분명히 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추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 제시된 사실을 듣고 분명히 자신의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6절에서 “그때 저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당신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했습니다.” . 이것은 사도언행록 1장 5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당신이 곧 성령에 의한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그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그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점에서는 아무도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상식 속에서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전하려 했던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추억을 먼저 깨달은 페트로의 말이 무너집니다. 18절에 “그러면 하나님은 이방인도 회개시켜 목숨을 주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그려집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베드로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에게 맞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에 의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게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뜻으로 평등하게 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정 민족이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이로써 사도들은 자신 안에 있는 차별의 마음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별은 눈치채고 반성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근본에 있던 것은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때에 진정한 의미로 차별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차별과 싸우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가고 싶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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