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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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칼바리 교회 설교 가사마 료 목사 2023년 3월 12일
「열과 냉정함」사도언행록 9장 19절~22절

3월 1일에는,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날로, 지난주는 텔레비전등에서 반복해 그 다큐멘터리나, 지금의 후쿠시마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희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기억을 풍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은 만약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확실히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지진이나 재해에 대한 대처는 각 가정에서도 중요합니다.
그런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만, 2년전에 일어난 미국 연방 의회 습격 사건은 여러분 기억하고 계실까 생각합니다. 2020년에 행해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고 해서, 1월 6일에 워싱턴에서 폭동이 일어나, 마침내 연방 의회에 폭도가 쏟아졌다고 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폭력에 의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선거는 제대로 행해지고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불복으로 한 사람들이 부풀어 오르고, 마침내 의회에의 난입까지 일어나 버렸고, 죽은 자도 나왔습니다. 당시에는 왜 이런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꽤 냉정한 분석이 행해지고 있어, 사람의 마음의 메카니즘으로부터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뜨거워지는 부분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르지만, 그렇게 해서 그것을 잘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에는 사명감이라는 부분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두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생각을 잘 자극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작은 인간이지만, 나에게도 사람을 위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 더욱 그 구체적인 방법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들이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옳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이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뜨거워지는 부분을 정의감이라는 형태로 자극해 주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2년 전의 미국에서는, 텔레비전과 스스로의 카리스마를 사용해 전 대통령이 그것을 실시한 결과, 연방 의회 습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좀 더 소규모라면 컬트라고 불리는 반사회적 종교가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잘 자극하는 기술에 뛰어나다. 어느새 마음에 사명감을 묻혀 버리고, 그 사명감을 자극받으면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게 되어 버립니다. 마인드 컨트롤의 기본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법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는 것, 그리고 머리를 냉정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밀려서 냉정함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냉정함을 버리지 않도록 머리를 식히는 것. 그렇게 합니다.
이 열의 용이함을 성경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사울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초 기독교의 적대자로 나타났으며, 그리스도인을 차례차례로 붙잡고 감옥에 넣었다. 이것을 사울은 사명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정의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은 예수님에 의해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지난주의 설교 개소에서 아나니아라는 인물에 손을 놓아 주면 다시 눈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구절을 읽으면, 19절과 20절에서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코의 제자들과 함께 있어 곧 곳곳의 회당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예수를 전파했다. "라고 있습니다. 게다가 22절에는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힘을 얻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논증하고 다마스코에 사는 유대인들을 비웃게 만들었다.”고 가파른 회심이 강조 되었습니다.
기독교 박해자가 회심하자 이번에는 기독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으면 사우로의 극단성 만 두드러집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매우 믿음직한 것입니다만, 단지 여기만 읽으면, 극단에서 극단으로 이행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다만, 사울 자신의 마음으로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9장 구절을 다시 읽어 보면, 「사울은 3일간, 눈이 보이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3일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이 3일이라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사울은 그때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될 것이라고 믿어 왔다는 것을 예수님에 의해 완전 부정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올바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때 사울의 내면에서는 격렬한 갈등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 젊었고, 혈기 왕성한 인물이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완전 부정되었을 때, 그는 격렬한 똑같이와 함께, 스스로를 다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3일간이라는 그 어둠의 시간은 그에게는 스스로를 다시 만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일간 그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계속 생각하고 하나님께 계속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하나님께 계속 묻습니다. 이만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왜 이런 처치를 하는가.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라고 하는 생각으로 시작되어, 예수와는 도대체 진실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거기서 얼마나 생각하고 있어도 대답에는 도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 속에서 그는 계속 생각합니다. 3일 후, 아나니아가 나타나 사울의 머리에 손을 뒀을 때, 그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지난주 성경 개소 18절에 “그러자 곧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고 사울은 원래처럼 보이게 되었다. ."라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단순히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사울을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시간과 같은 시간입니다. 이것도 아마 상징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그때까지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확실히 사울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로지 생각을 빼앗은 뒤에 구원이 주어지면서 그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사울, 앞으로는 바울이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열광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 위에 전략적으로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는 생각을 가진 인물로 다시 태어납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택하신 것으로 올바른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뜨거운 마음을 가지면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전도할 수 있다. 그것이 바울이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택하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열광적인 신앙심과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바울의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균형 잡힌 믿음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이 페이지는 google 번역에서 일본어로 번역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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